최근 내 사고의 과정이 더 명확해지면서 이전에 관여하며 고찰해오던 사안들에 대해서도 내 입장이 분명해졌다. 특히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인간주의다” 책을 읽고 내가 직감적으로 품었던 모호한 의구심들이 명료해졌다.
실존, 존재
“…man first of all exists, encounters himself, surges up in the world – and defines himself afterwards.”
인간은 우선적으로 존재하며, 자신을 마주한 후 세상으로 솟구친다. 이 후에 비로소 자신을 정의하게 된다.
행위로서의 존재가 본질에 앞서는 것이다.
근본, 필연, 결정, 규정, 신성
“In the philosophic atheism of the eighteenth century, the notion of God is suppressed, but not, for all that, the idea that essence is prior to existence; something of that idea we still find everywhere, in Diderot, in Voltaire and even in Kant… In Kant, this universality goes so far that the wild man of the woods, man in the state of nature and the bourgeois are all contained in the same definition and have the same fundamental qualities.”
“…existentialist will never take man as the end, since man is still to be determined… The cult of humanity ends in Comtian humanism, shut-in upon itself, and – this must be said – in Fascism.”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는 말은 곧 인간은 우연으로 세상에 왔으며 그 어떤 이유나 필연성으로 세상에 존재하는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기에 신, 희망, 열정과 같이 막연한 외부의 어떤 힘에 기대거나 이끌리는 것은 책임을 전가시키는 비겁한 일이다.
심지어 동양에서 말하는 “자연의 섭리”, 또는 “스스로 그러함” 또한 선험적이고 필연적인 본질을 상정하는 것이며 신성화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고조선시대 인간과 현대 인간이 본질적으로 같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 따위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추적해, 인간을 신성화하는 인본주의를 사상적 토대로 삼는 한민족이라는 근본을 정의하고 규정하려는 것은 한낱 환상적 민족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현실적 경제-문화-공동체로서의 조건은 개인의 선택에서 생각해볼 수 있겠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그는 민족주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셨다. 불교의 영원회귀에 대해 언급하신 기억이 난다. 과연 그는 그의 선택에 후회하지 않았을까? 훗날 자식들이 증명해준다고 하지 않던가? 그는 현실을 직시하고 감당하고 있었던가?
또한 인간을 목적으로 삼아야한다는 칸트, 콤트, 공자의 격언 또한 인간을 규정하고 신성화시키기 때문에 모순이다. 그렇기에 의식으로부터 규정된 것을 계속 쫓는 것은 불행으로 가는 것이다. 의식에서 벗어나려는 끊임없는 운동에 철학과 삶의 강력한 의미들이 있다.
주관성, 의지, 선택, 창의
“For in effect, of all the actions a man may take in order to create himself as he wills to be, there is not one which is not creative, at the same time, of an image of man such as he believes he ought to be… In fashioning myself I fashion man.”
무엇하나 규정된 것은 없기에 객관성은 증명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존재자로서 인간은 누구도 결국 자신의 주관성으로부터 시작하며 주관성을 벗을 수는 없다.
하지만 주관성이 보편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누구나 주관적이기 때문에, 그리고 결정적으로 어떠한 선택도, 인간으로서의 당위를 내세움으로써 창의적이지 않은 것은 없기 때문에, 개인이 자신의 의지로 자신을 위한 선택을 했을 때 그 선택은 인간보편을 대표하는 선택이다. 나 스스로를 빚어내는 일은 인간보편을 빚어내는 일이다.
이 말은 결국 선택을 향한 자유의지만이 목적이 될 수 있으며 보편성을 대표하는 추상적이고 증명할 수 없는 전제들(평화, 평등, 통일 등) 또한 자유의지에 따라오는 부차적인 것이다. 이렇듯 개인의 특수성이 만족 될 때 보편성 또한 만족되는 것이다.
인간보편, 불안, 책임, 주권
나에 대한 나의 자유 선택이 동시에 인간 보편을 빚어낸다는 사실은, 그렇기에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현실은 오히려 어떤 책임에서도 벗어난 홀가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삶에, 내 존재에, 그리고 인간보편에 있어 모든 책임이 내 두 어깨에 있다는 인식을 통해 나 자신을 향한 화살로 돌아오며, 그러한 사실을 외면하지 않는 한, 그로인해 불안하고 초조해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선택 가운데 최선의 것을 택해야 한다는 책임의 불안은 실천의 조건이며, 우리로부터 선택의 책임을 저버리라는 지침이 아니라, 오히려 선택을 통해서만이 자신의 주권을 보장하며 자유를 취하게 된다.
자유, 타자
“Obviously, freedom as the definition of a man does not depend upon others, but as soon as there is a commitment, I am obliged to will the liberty of others at the same time as my own. I cannot make liberty my aim unless I make that of others equally my aim.”
이렇듯 나의 주관성과 주체성이 확립하는 주권은 타자에게 종속됨과 동시에 대립한다. 왜냐하면 자아는 타자를 통해 형성되고 나의 주권은 타자를 통해서만 발현되며, 타자의 자유가 나의 자유만큼이나 주체적인 것임을 우리는 같은 인간으로서 인정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타자의 자유를 위해 나의 자유를, 동시에 나의 자유를 위해 타자의 자유를 목적으로 삼을 수 밖에 없다.
도덕, 정의, 대의, 가정
“The Kantian ethic says, Never regard another as a means, but always as an end.”
“Kant declared that freedom is a will both to itself and to the freedom of others. Agreed: but he thinks that the formal and the universal suffice for the constitution of a morality.”
“A man who belongs to some communist or revolutionary society wills certain concrete ends, which imply the will to freedom, but that freedom is willed in community. We will freedom for freedom’s sake, in and through particular circumstances.”
유교에서 말하는 인과 예는 칸트가 말하는 인간 자체를 목적으로 삼으라는 도덕의식과 매우 유사하다. 칸트는 격식을 갖추고 보편성이 전제되면 도덕성을 밝히기에 충분하다 생각했다.
그러나 사르트르의 예를 통한 비판과 같이, 한 선택은 현실에서 같은 양상을 띄더라도 상반된 의미를 내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가정과 사회적 대의명분 사이, 둘다 중요하지만 때에 따라 하나를 택해야 하는 극단적인 상황에 처했을 경우, 어느 것 하나를 목적으로 삼기위해 다른 하나는 수단이 될 수밖에 없다. 어떠한 판단을 하더라도 한 개인은 그가 처한 상황에서 자신이 가장 욕망하는 것을 택할 뿐이다.
만약 그가 사회를 택한다면 그 개인은 자신이 택한 대의명분이 자신이 쳐해진 환경을 극복하는데 이바지 하는 것이라 느끼기 때문일 것이라 추측해 볼 수 있다. 혹은 자랄 때 가정에서의 관계가 화목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족이라는 공동체 바깥에서 자신을 실현해보이려는 의지가 강할 수도 있다. 혹은 대의명분을 통해 내가 정의롭다는 것을 외부에서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혹은 정반대로 그는 자신의 절대자유를 직시하기가 버겁기 때문에 대의명분에 자신을 바침으로서 그 절대자유의 고독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로서의 선택일 수도 있다. 혹은 처해진 상황과 범주에 따라 사회를 선택함이 가정적인 행위로 드러날 수도 있다. 어떤 이유에서 간에 중요한 것은 진정성이다. 그리고 그 진정성은 한두가지 사건에 자신을 거는게 아닌, 자신의 존재 자체를 건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진정성은 일관성을 통해 타자에게 최대한 분명하게 드러나지만, 결국 만끽(후회없음)을 통해 자신만이 확인하게 될 것이다.
가치, 판단, 진정성, 감정, 행동
이렇듯 어떤 정해진 도덕적 규율이란 있을 수 없다. 오로지 자유의지로서, 자신의 직관과 감정에서 비롯한 일관된 선택과 행위를 통해 드러나는 진정성만이 가치 판단의 근거와 기준이 된다.
그러나 또한 감정과 행동은 서로 상생관계이기 때문에 감정이 행동에 영향을 주고 또한 행동이 감정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그렇기에 선택을 통한 행동에는 존재 자체를 거는 용기을 요구하며, 그 행동을 통한 감정의 변화를 사유해야 한다.
자기기만, 외면, 도피, 비겁, 찌꺼기
“Those who hide from this total freedom, in a disguise of solemnity or with deterministic excuses, I shall call cowards. Others, who try to show that their existence is necessary, when it is merely an accident of the appearance of the human race on earth – I shall call scum. But neither cowards nor scum can be identified except upon the plane of strict authenticity.”
완전한 자유를 직시하지 못하고 근엄함이나 이미 규정된 무언가로 도피하는 이들은 자기 기만자이며, 비겁자이다. 그리고 존재의 우연보다 필연을 믿는자는 인간찌꺼기다. 자신의 주권을 포기한 자가 찌꺼기가 아니면 무엇인가?
부정, 고뇌, 희망, 기대, 꿈, 열정
침묵주의는 결국 항상 자신의 행동을 통해 자신의 삶을 증명하기 보다는 환경 탓을 할 뿐이다. 그렇기에 식민주의를 비난하고 저항할 수는 있지만, 탓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부정하는 행위일 뿐이다. 물론 자신의 과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지 못한 자에게는 실존주의는 버거운 말이다.
하지만 희망, 기대, 꿈과 같이 자신의 가능한 행동의 영역에서 벗어난 공허한 것들에 대해 고뇌한다는 것은 인간을 부정하는 것이다. 자신의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희망을 불러올 필요는 없다. 고뇌한다는 것은 자신을 부정하는 패배적 자세이다.
기반, 진보, 상황
“It is true in the sense that we do not believe in progress. Progress implies amelioration; but man is always the same, facing a situation which is always changing, and choice remains always a choice in the situation.”
“Man is all the time outside of himself… Since man is thus self-surpassing, and can grasp objects only in relation to his self-surpassing, he is himself the heart and center of his transcendence.”
기반이란 없다. 인간은 식물과 같이 뿌리를 두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항상 자신의 밖으로 향해 자신을 넘어서는 존재이기 때문에 장소없는 장소성으로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진보”라는 개념 또한 우리는 의심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진보는 기반을, 규정된 것을 상정할 뿐만 아니라 개선이라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단지 상황이 바뀌는 것 뿐이고 바뀐 상황에 최적의 선택을 하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작가는 작품으로서만 평가되는게 아니다. 단지, 그의 발자취 모두의 합, 그것만이 그 자신인 것이다.
변증적, 장소 없는, 특수한 장소성
“There is no other universe except the human universe, the universe of human subjectivity. This relation of transcendence as constitutive of man (not in the sense that God is transcendent, but in the sense of self-surpassing) with subjectivity (in such as sense that man is not shut up in himself but forever present in a human universe) – it is this that we call existential humanism. This is humanism, because we remind man that there is no legislator but himself; that he himself, thus abandoned, must decide for himself; also because we show that it is not by turning back upon himself, but always by seeking, beyond himself, an aim which is one of liberation or of some particular realization, that man can realize himself as truly human.”
일단 내 상황에서 내 자신에게 묻는다. 세월호와 북한은 내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내 존재 자체를 걸고 있는가? 공산당원들과 같이 뚜렷한 기반을 삼는 공동체와 같이 규정된 무엇을 목적으로 향한 부차적인 자유의지 아닌 자유의지가 아니라, 자유의지 자체를 목적으로 삼고 있는가? 나 자신의 특수성을 빚어내는데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한국국민이 아니고 한국사회에 살고 있지 않을 뿐더러, 유람하는 정체성, 장소없는 장소성을 지닌 나로서는 한국의 사회 문제는 한국 바깥의 사회적 맥락에서 살아가는 내 실존적 상황 이해의 조건일 뿐, 목적이 될 수가 없다. 그리고 내 가정에 대한 책임을 앞설 수는 없다. 한동안 내가 혼동했다면, 미국사회에 대한 역겨움과 원한에서 비롯된 민족주의적 정서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내 실존적 범주에서 상황을 판단하자면, 내게 더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사안은 미천한 실용주의와 이윤추구를 기반으로 형성된 미국 중심주의를 해체하는 것이다. 미국 중심 이윤추구 논리로 세계가 돌아가는 한, 세월호 법을 만들고 책임자들을 처벌한다 하더라도 어느 균열을 통해서든 자의적이지 않은 사고는 또 터질 것이다. 세월호와 관련된 진상규명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사회의, 그러므로 결국 개인의 체질개선의 시급함을 외면하는 이들 때문에 그렇다. 유가족들에게는 진상규명 자체가 자유의지로서 목적이 될 수 밖에 없지만, 많은 이들에게 진상규명이 같은 의미를 갖기는 쉽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진상규명이 이뤄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체질개선이 필요함을 알고 있다. 공소시효만료 전에 진상규명이 이뤄지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두가지로 볼 수 있겠다. 첫째는 유가족들이 잃어버린 이들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데 있고, 둘째는 국민들의 사회와 개인의 체질개선에 대한 의지를 확인함에 있겠다.
세월호와 마찬가지로 세상에는 수 없이 많은 정의롭지 못한 희생이 일어나고 있다. 한 개인이 그 모든 일에 정의를 구현할 수는 없다. 현재 내 상황 상 내 가정이라는 타자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데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우선될 수 밖에 없다. 그 다음은 내 가까이서 변증적 과정을 함께 거치는 타자들에게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세월호와 북한에 관해 전시준비를 하는 것도, 이 사건과 상황을 이해함으로서, 타자의 자유를 대변함과 동시에 내 자신을 넘어서고 빚어내며, 가정을 통해 그 다음 세대를 빚어내는데 기여하기 위함이다. 세월호에 연대하고 내 최소한의 역할을 할만큼의 마음은 있다. 그러나 현재 내 존재적 범주에서 세월호에 내가 두 발벗고 주도적으로 진상규명을 위한 운동에 관여할 만한 상황은 아니라는 판단이다.
결국 서구에서 살아가며 사회의 중심 세력으로서 내 자신을 실현하기엔 악조건에 처해있는게 내가 처한 현실의 상황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이방인으로서 내 특수성은 더 부각된다. 변증적 절차, 반시대적 고찰에서 내가 도취할 과업, 쟁취할 자유는 그들의 위대한 적이 되는 것이다.
aside: 철학의 빈곤
모든게 아직은 의구심일 뿐이지만, 그 실천방식에는 철학이 빈곤하다.
겉 표면일 뿐인 현실정치 한쪽으로 너무 많이 치우쳐있다.
겉표면으로 드러나는 의미로 혁명이란 말을 치우쳐서 해석하고 있지는 않나?
동지라는 말도, 혁명이라는 말도, 과거 경험에 기반한 낭만적인 무엇을 계속 잡고 있는 듯 하다.
자신의 특수성을 실현하지 못하면 주변에서 매력을 느끼고 함께 할 이들이 없다.
주변에 모이는 이들은 모두 한이 맺혀 있는 이들이다.
밤의 기운으로 생활한다. 규정된 장소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이는 또 그 당시 환경을 결국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독을 홀로 이겨내지 못했고, 지금도 고독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교민들과 뭉치려 하는 것이다.
나에게는 그런 집착은 없다. 그저 현실을 살아가는 것 뿐이다.
그는 말한다. 사람들에게 희망이 없으니 삶이 너무 무겁다고.
아마 희망이라는 안일한 감정에 기댔기 때문에 87혁명 후 스스로 설 힘으로 나아가지 못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