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 finissage

Q41. J32. insights causing questions

Quote of the day

The point should not be to have absolutely correct, irrefutable, water-tight cognitions – for they inevitably boil down to tautologies, but insights which cause the question of their justness to judge itself. – To say this is not, however, to advocate irrationalism, the postulation of arbitrary theses justified by an intuitive faith in revelation, but the abolition of the distinction between thesis and argument.
In a philosophical text all the propositions ought to be equally close to the centre.
Because it acknowledges no first principle, it ought, strictly speaking, to know of nothing secondary or deduced; and it transfers the concept of mediation from formal connections to the substance of the object itself, thereby attempting to overcome the difference between the latter and an external thought that mediates it.

Minima Moralia, Theodor Adorno, p.71

Words

tautology: 동어반복
auxiliary: 보조자
supposition: 상상
deduce: 유례를 캐다, 연역하다


Journey and Journal

어제 한일:
커피, Coding Train API, Node.js, Express Tutorials.
뉴스공장 이재용 기소문제, 미국 브라질 코로나 확산, 볼튼회고록, 북한태도전환.
회사에서 두철수 아도르노와 데리다 들음.
점심저녁 데친 야채, 템페, 김치, 초코뮤슬리, 밥.
Amanda Jonas와 같이 Hasenheide공원 에서 맥주마시며 여름을 즐김. 공원 한쪽에선 Queer 사람들 사회적 거리두기 어기며 파티함.
공원가는 길에 아는 비보이 마주쳐서 다음에 같이 연습하기로 함.
시리 자전거 도둑맞은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Lidl에 세워놓음. What’sApp 이웃채팅방에 공고했는데 나중에 웃음거리됨.
버스타고 지인 아티스트 Finissage에 감. 작품은 대체로 그 자체로서 내게 큰 감응을 주진 못했지만 사람들이 모임으로해서 코로나의 초조한 상황을 나눈 듯. 언어에 대해서 얘기 나누며 한자와 갑골문 배경에 대해서도 얘기나눔.

정보들을 많이 접하고 사물과 현상의 역사를 접할 수록 잊히는 것도 많아서 안타깝다.
알면 알수록 모든 것의 유례를 캐고자 하는 솟구치는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어 애가 탄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다 담아 보관하려는게 자기유지정신 이렸다.
먹은 것을 소화하고 나머지는 똥을 싸야하듯이, 소화하고 연소시키는 과정에서 내면화되고 체득되리라.
특히 Talk & Progress를 진행하며 점점 내가 세운 주제들에 대해 완고한 입장을 취하게 되는 것을 경험했다.
애초 질문을 하게 끔 한 그 통찰력이 관건이다.
어제는 지인의 전시 finissage에 갔다. 항상 느꼈지만 미국에서 자란 그녀는 자신을 홍보대상으로 내세우는 일에 매우 적극적이다. 그녀가 스튜디오에서 보내는 시간에서 무엇이 “쿵푸”로서 내면화되고 체득되는 과정을 거치는가?  
코딩은 단순히 유용성과 요령이기보다는 그 자체로서 대상이 될 수 있는가? 코딩을 배운다는 것 또한, 유용한 코딩신텍스와 요령을 습득하기 보다는, 코딩이라는 잡힐 수 없는 대상 그 자체를 내 손가락과 복잡한 연결 회로를 상상하는 두뇌운동을 통해 내면화시키는 변증적 과정이 될 수는 없나?
독서를 하며 모르는 영단어들을 외우는 방식으로서 일기에 버무리는 한글 글쓰기는 유용성과 통찰력의 간극을 번역하려 갈팡질팡하며 이도저도 아닌 것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유용성과 통찰력 사이의 번역?